유클리드 기하학은 그리스의 수학자 유클리드가 그의 저서에서 전개한 10개의 공리 및 공준,
또는 이 체계를 수정한 것을 바탕으로 한 점, 선, 각, 표면, 입체 등에 대해 연구한 내용을 말한다. 유클리드 기하학은 공간에 대한 수학으로서의 내용만큼이나 유클리드가 수학을 소개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사용했던
체계적인 연역적 방법으로 유명하다.
Euclid Alexandreiae
유클리드의 생애에 대하여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데, 아마도 플라톤의
아카데미에서 공부한 뒤, 프톨레마이오스 왕의 초청에 따라 알렉산드리아로 온 학자가 아닌가 추정된다. 그는 광학, 음악, 천문학
등에 관한 10가지 정도의 책을 썼는데, 그 중 5가지는 아랍어로 번역된 것이 남아 있다. 그는 그때까지 알려져 있던
거의 모든 수학의 지식을 깊이 연구한 뒤에 그것을 한 이론 체계로 조직하여 저술한, 전13권으로 된 대저작 ‘원론(Stoikeia)’으로
불멸의 이름을 남겼다.
‘원론’에서 유클리드는
그의 선구자들이 발견한 중요한 기하학적 사실을 체계적인 형식으로 기록하였는데, 기하학의 논리전개에 필요한
증명 없이 사용하는 다섯 개의 공준과 크기의 문제에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다섯 개의 공리에 기초를 두고, 사용하는
용어에 대한 정의를 명백히 하여, 어떤 특수한 도형의 특수한 성질이 아닌 일반적인 도형의 일반적인 성질을
하나 하나 정리로서 증명하여 나가고 있다. ‘원론’에 나와
있는 평면기하학의 공준과 공리를 열거해 보면 다음과 같다.
공리
같은 것과 같은 것들은 서로 같다.
같은 것들에 같은 것을 더하면 그 합은 서로 같다.
같은 것들에서 같은 것을 빼면 그 차는 서로 같다.
서로 포개어지는 것들은 서로 같다.
전체는 부분보다 크다.
공준
임의의 서로 다른 두 점은 직선으로 연결할 수 있다.
직선은 무한히 연장할 수 있다.
임의의 점을 중심으로 하고 임의의 길이를 반지름으로 하는 원을
그릴 수 있다.
모든 직각은 같다.
한 평면 위의 한 직선이 그 평면 위의 두 직선과 만날 때
동측 내각의 합이 2직각보다 작으면 이 두 직선은 그쪽에서 만난다.
특히 유클리드의 제5 공준은 평행선 공리라 불리며, 이후 비유클리드 기하학이 탄생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했다. 유클리드 기하학에서는 직선 밖의 한 점을 지나 그 직선과 만나지 않는 직선은 하나밖에
없다는 것을 가정하고 있었다. 즉, 평행선은 아무리 연장하여도
만나지 않는다고 가정하고 있는데, 19세기에 들어와서는 이 가정을 부정해도 유클리드 기하학의 다른 정리와
모순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사실이 밝혀지게 되었다. 그래서 야노스 보여이 및 니콜라이 로바체프스키는 직선
밖의 한 점을 지나는 직선은 무한히 있다고 가정하여 유클리드 기하학의 나머지 공리와 결합시켜 새로운 기하학을 세울 수 있었다.
비유클리드 기하학이라는 명칭은 가우스가 처음으로 사용하였는데, 당시에는
그 의미를 엄밀하게 정의하기 쉽지 않았다. 크리스티안 클라인은 가우스와 보여이 및 로바체프스키의 기하학을
쌍곡선 기하학, 이를 다소 수정한 리만 기하학을 타원 기하학이라 하였고, 이들 두 새로운 기하학을 합하여 포물선 기하학이라고 하였다.
Carl Friedrich Gauss
방정식에서 위대한 업적을 남긴 가우스는 독일의 브라운쉬바이히 공국에서 벽돌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영주 페르디난도 공에게서 천재로 인정받아, 그의 도움으로
대학 교육을 받았고, 30세에 이르기까지 영주의 비호 밑에 평온한 연구 생활에 몰두할 수 있었다. 1807년 모교인 괴팅겐대학의 교수 겸 천문대장으로 취임한 뒤, 79세로
죽을 때까지 그 자리에 있었다. 그는 대수학의 기본정리를 비롯하여 정수론, 천문학, 전자기학, 해석학, 최소자승법, 미분기하학 등에서 큰 업적을 남겼다. 그는 ‘수학은 과학의 여왕이고, 정수론은
수학의 여왕이다’라고 했으나, 그가 죽은 뒤에 영주는 그를
위한 기념비에 ‘수학자의 군주’라는 칭호를 넣어 그의 업적을
칭송하였다.
유클리드 기하학에서는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180°가 되나 쌍곡선
기하학에서는 그보다 작게 되며, 타원 기하학에서는 그보다 커진다. 또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대상이 되는 공간을 비유클리드 공간이라 한다. 비유클리드의 기하학의 발견은 19세기 수학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의 하나로 볼 수 있다.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발견은 공리를 자명한 명제로만 여겨왔던 기존의 사고방식에 혁명적인 변혁을 가져왔으며, 사상사에
있어서도 진화론이나 상대성 이론의 탄생과도 비견되는 것으로서 물리적 세계에 대한 인간의 생각을 급변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