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2000년 전 인도에서는 수평 또는 수직으로 적당한 개수의 선을
그어 수를 표시했다. 이후 마른 나뭇잎이나 나무껍질에 글씨를 쓰기 시작하면서 점차 필기하는 모양이 변했다. 이 과정에서 변형된 패턴을 따라 서로 다른 9개의 숫자들이 만들어졌다. 한편, 유럽대륙 전역에서는 로마의 숫자 체계가 사용되고 있었다. 이 체계는 이집트에서 발견된 최초의 숫자들을 개량한 것으로 숫자에 상징적인 획을 긋고 10에는 특별한 표시를 했으며 숫자 이름의 첫 번째 글자를 기록하는 그리스 아테네의 방식도 응용되었다.
숫자가 지금과 같이 쓰이지 않았던 과거에는 동서양 모두 주판을 이용해 계산했다.
이 고대 주판에서 만약 이 단순히 어떤 두 홈에 각각 들어 있는 두 개의 조약돌을 나타낸 것이었다면,
그 수는 22, 220, 202, 2002 등의 수 중 하나를 의미했을 것이다. 이렇게 고대 주판에서 수를 알기 위해서는 홈마다 있는 조약돌 개수뿐만 아니라 각 조약돌이 몇 번째 홈에 있는
지도 알아야 했다.
정확한 신원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인도의 서기로 추정되는 한 사람이 처음으로 우리가 수를 표기하는 것과 비슷한
표기법을 고안했다. 그는 주판에서 조약돌 수를 나타내기 위해 특별한 표시를 했다. 오늘날 우리가 비어있는 자릿수를 표시하기 위해 0을 사용하는 것과
같이 그는 주판의 비어있는 열을 나타내기 위해 점을 사용했다. 인도의 산스크리트어에 ‘공백’이나 ‘부재’를 의미하는 ‘슈냐’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아주 오래 전부터 인도의 삶과 문화에서 종교 및 신화적 사고의 핵심적 내용을 구성하고 있었다. 본래 슈나는 공백, 하늘, 공기, 공간의 의미를 지녔으며 나아가 창조되지 않은 것, 존재하지 않는
것, 형상화되지 않은 것, 사유되지 않은 것, 부재, 없음 등을 의미했다. 따라서
인도 학자들은 슈나를 수의 요소로서 ‘없음’을 표현하는데, 수학적 관점에서뿐만 아니라 철학적 관점에서도 매우 적절하다고 판단했다.
0을 포함해 모두 10개의
기호를 사용한 인도의 숫자 체계는 실크로드를 왕래하던 아라비아 상인들에 의해 아랍 지역에 전해졌다. 그리고, 9세기 지리학자이자 대수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조로아스터교 신자 알콰리즈미를 비롯한 아랍 수학자들이 인도의
숫자 표기법을 아랍어에 맞게 변형하였고 0이라는 전혀 새로운 숫자 개념을 소개하면서 수학에서 일대 혁명을
일으켰다. 알콰리즈미의 ‘집합과 분할의 서’란 논문이 12세기 ‘인도
숫자에 대한 알콰리즈미의 서’란 제목을 달고 라틴어로 번역됨으로써 유럽인들은 처음으로 영을 포함한 숫자를
알게 되었다. 숫자의 발달에 얽힌 이러한 사연을 알지 못했던 유럽인들은, 숫자를 아랍인들에게서 전수받아 알게 되었기 때문에 ‘아라비아 숫자’라고 불렀다. 그러나, 아라비아
숫자의 등장은 획기적인 사건이었기 때문에 당시 유럽에서는 반발이 심했다. 유럽사람들의 변화를 싫어하는
보수적인 성격도 한 몫 했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아라비아 숫자를 이용해 분수를 표기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 인도의 숫자 표기법은 유럽에 널리 퍼지지
못했다.
1202년 피보나치라고 알려진 레오나르도 피사노가 독창적인 저서 ‘주판서’를 출판함으로써 비로소 유럽에서 아라비아 숫자가 대중화 되었다. 피보나치는 이탈리아에서 태어났지만 오늘날의 알제리아 베자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성장하며 아랍인 선생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는데, 이때 고대 인도에서 고안되어 유럽에서는 아직 보편화되지 않은 숫자 체계를 배우게 되었다. 그는 이 숫자 체계가 오직 9개의 서로 다른 기호로 각 열에 조약돌
개수를 표기하고 비어 있는 열은 0으로 나타냈기 때문에 로마 숫자에 비해 훨씬 사용하기 편리하다고 생각했고, 이는 유럽의 상인이나 무역업자가 매매나 부기 등에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점차 유럽에 전파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