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톰 소여의 모험' 및 '허클베리 핀의 모험'이라는 소설로 잘 알려진 미국의 소설가 마크 트웨인은 '역사는 그 자체로서 반복되지는 않더라도, 유사한 형식으로 다시 나타난다'고 하였다. 즉, 과거에 일어났던 사건들과 그 사건들을 둘러싼 사회적 맥락을 들여다보면, 지금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에 대한 단서는 얻을 수 있을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민주주의로 포장된 신자유주의 경제 체제가 급격하게 팽창해가던 시기 모든 이들은 그저 급격히 성장해가는 경제와 그 안에서 나날이 개선되어 가는 삶의 질에 취해 있었다. 때문에 이러한 패턴에 변화를 줄 수 있는 절차 상의 문제나 사소한 듯 여겨지는 문제들은 의도적으로 덮어두었던 측면이 있다. 즉, 대세를 거스르지만 않는다면 사소한 잘못 쯤은 어렵지 않게 눈감아주는 시대였고, 조금 더 거창하게 얘기하면 잘못된 역사에 대한 단죄가 등한시 되던 시대였다. 그러나, 잘못된 방식으로 쫓아왔던 성장은 어느 시점에 이르러 한계에 부딪치게 되었고, 곳곳에서 파열음들이 생겨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로부터의 관성에 젖은 이들은 이 파열음들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을 뿐더러, 이 파열음들을 철저하게 고립시키기까지 했다. 이들이 파열음들을 이토록 철저하게 고립시킬 수 있었던 수단은 잘 디자인된 교육 프로그램이었다.
반면에, 급격한 성장의 시기를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세대들은 이제껏 이 파열음들 속에서 자라오며, 체제 전반에 대한 의구심을 키워 왔다. 그러나, 잘 디자인된 교육 덕분에 이들은 그 의구심을 표출하고 개선을 유도해내는 방법을 알지 못했고, 그저 순응하며 살아갈 뿐이었다. 이들이 알지 못했던 바는, 순간순간 터져나오는 불만들과 저항들이 그때그때 해결되지 못한채 억눌리며 쌓여가면, 결국 더 크게 폭발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러한 상황의 위험성을 간접적으로 경고해왔던 사람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다양한 문학 작품들 속에는 은유를 통해 이 불합리한 사회 체제가 어떻게 귀결될 것인지에 대한 의미있는 경고들이 있었다. 다만, 이 역시 기득권층은 저변에 깔린 메세지 자체 보다는 문학적 수사에 초점을 둔 교육의 재료로 둔갑시켰다. 지금 우리나라, 그리고 세계 전반에 걸쳐 드러나는 갈등과 반목을 보면, 이제 그간 유지되어 왔던 사회적 체계가 지녀온 불합리가 한계에 달한 듯 보인다. 세대간의 갈등으로 나타나는 사회적 갈등은 이제 세계 어디를 가나 위험한 수준에 달한 듯 느껴진다.
그렇기에, 아직 어린 아이들을 키우며 살아가는 우리 또래들에게 국정 역사 교과서는 참담하게 느껴질 수 밖에 없다. 어린 시절 획일화된 역사적 관점을 주입받으며 자라오다가, 어른이 되어 다른 세계들을 경험하며 그 허구를 인지하게 된 이들이 과연 아이들을 또다시 그런 방식으로 키우고 싶을까? 내가 시행착오를 통해 느끼게 된 잘못된 역사를 아이들이 똑같이 느끼게 되기까지 이 아이들은 또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를 겪게 될까? 그리고, 무엇보다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소란스러움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이 소란스러움이 자연스럽게 다루어지는 것을 보지 못하고 자란 아이들이 이해하게 될 날이 오기는 할까?
마크 트웨인의 말처럼 이들은 잘못된 역사를 유사한 형식으로 되풀이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그 결과 또한 되풀이하게 될 것만 같다. 그러나, 결국 피해자에 지나지 않는 특정 세대에게 사회의 불합리에 대한 책임을 지울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민주주의에 수반되는 소란스러운(?) 이견의 조율을 겪지 못하면서 자라왔다. 그렇게 살아왔던 방식으로 여지껏 큰 문제가 없었다고 느끼기에, 그들의 방식을 자녀들에게도 강권하고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의 역사와 사회가 바로 서지 못하게 된 가장 결정적인 계기가 우리나라의 독립 과정에서 친일파들을 단죄하지 못했던 데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 자체에는 세대를 막론하고 이견이 없으리라 생각한다.
이와 관련하여 국정 역사 교과서에서 불편한 내용들 중 하나는 이승만에 대한 왜곡이다. 어릴적 배웠던 왜곡된 역사와 달리, 어른이 된 지금 그에 대해 이해하고 있는 바는 다음과 같다.
독립에의 기여 주장: 우리나라의 독립을 결정한 가장 중요한 역사적 근거는 카이로선언이다. 카이로선언은 1943년 11월 27일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과 영국의 처칠 수상, 중국의 장제스 총통이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에 모여 발표한 공동선언이다. 1943년 11월23일부터 5일간에 걸친 회담을 통해 3대 연합국은 승전하더라도 자국의 영토 확장을 도모하지 않으며, 일본이 1차대전이후 약탈한 영토를 반환하는 것에 합의했다. 특히, 한국을 자유독립국가로 승인할 결의를 하여 처음으로 한국의 독립이 국제적으로 보장되었다. 오늘날 역사 교과서 논쟁이 격화되는 가운데 역사학자 사이에는 한국독립의 문구가 들어간 것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장제스가 주도했다는 의견부터, 루즈벨트 대통령의 특별보좌관 해리 홉킨스가 독창적으로 타이피스트에게 구술했다는 주장도 있다. 이같은 주장의 이면엔 누가 장제스나 홉킨스를 움직였느냐, 다시 말해서 김구 등 임시정부의 공이냐, 아니면, 이승만 박사의 대미 로비 덕이냐라는 것에 대한 논란이 자리잡고 있다. 이에 대해 재미한국역사가인 김태환 하버드대 남가주한인동창회장은 "카이로선언에 이승만박사가 공헌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대미외교에서 이승만박사의 로비는 없었다"고 단언했다. 그는 "김구 측 공적을 내세우는 편에서는 장제스 총통과 김구 주석, 김원봉 등 임정 간부의 회동을 비롯한 임시정부 기록과 장제스의 일기장, 장의 비서장인 왕충후이의 회담 자료를 증거로 제시한 반면, 이승만의 로비설을 주장하는 측은 아무런 물증도 없이 이 박사가 감리교인이고, 또한 홉킨스도 감리교인이었기 때문에 서로 교감이 있었을 것이라는 당치도 않는 추측 밖에는 내세운 것이 없다"고 지적했다.
반민특위 해체: 우여곡절 끝에 독립을 쟁취한 우리나라는 1948년 헌법 제정과 동시에 일제에 협력했던 친일파를 청산하기 위해 반민족행위 처벌법을 제정한다. 그리고 이 법에 따라 1948년 10월 국회에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구성된다. 1949년 1월 5일 반민특위는 중앙청 205호실에 사무실을 차리고, 8일 화신백화점 사장이었던 박흥식을 체포함으로써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간다. 그러나, 친일파들은 이승만의 정권장악과 유지에 핵심적 역할을 하였기에, 이승만은 반민특위의 활동을 방해하고 무력화시키고자 한다. 결국, 친일파 처단은 국회가 나설일이 아니라며 견제하기 시작했다가, 국회 프락치 사건을 일으키며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하기에 이른다. 이들의 불법적인 습격에 의해 반민특위 사무실은 유묭무실하게 되고, 반민특위 조사원 40여명과 특별검찰부장이 경찰서에 감금된다. 이어서, 서울시 경찰국 경찰 9천여명은 반민특경대를 해산하라고 압박하며 그렇지 않으면 총사퇴하겠다고 압박한다. 결국, 이승만은 1년만에 반민족행위 처벌법 폐지안을 국회에 상정했고, 이 법은 폐지되고 만다.
한강 인도교 폭파: 이승만의 가장 큰 과오 중 또 다른 하나는 한국전쟁 당시 한강 인도교 폭파로 무고한 국민들을 희생시킨 것이다. 1950년 6월 28일 새벽 2시 15분, 국군은 북한군의 남하를 막기 위해 한강인도교를 폭파했다. 이미 대통령 이승만은 27일 새벽, 총참모장 채병덕은 28일 새벽 2시, 국방장관 신성모는 27일 오후 2시에 서울을 벗어난 이후였다. 이승만은 "국민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대한민국 국군은 인민군의 공격을 막아내고 이미 해주를 탈환했습니다."라는 허위 내용을 녹음해 놓은 라디오 방송만 계속 틀어 놓았다. 게다가 북한군의 추격을 우려했던 이들은 한강 인도교를 폭파해 이를 통해 피난 중이던 국민 1천여명을 희생시켰다. 이승만은 한강 인도교 폭파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가 치솟자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관련된 군인들을 군사 재판에 회부했다. 한강 인도교 폭파 책임자였던 공병감 최창식 대령을 희생양으로 삼아 1950년 9월 21일 총살형에 처했다. 그러나 14년 후 최창식 대령의 부인이 제기한 항소심에서 법원은 "최창식 대령은 상관 명령에 복종한 것"으로 인정하고 무죄를 선고했다.